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리드리히 대왕 (문단 편집) == 여담 == * 프리드리히 대왕은 [[불가지론]]자였고, 종교로 인한 독선과 아집을 불신했기 때문에 종교로 인한 차별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왕실의 칼뱅파 개신교와 국교인 루터파 개신교뿐만 아니라 가톨릭 신자에 대한 차별에도 반대했으며, 보스니아 출신의 무슬림 용병을 위해서 베를린에 모스크를 지어주려고 할 정도였다. * 한국에서는 몇몇 [[학습만화]]의 오류[* 특히 8~90년대에 범람했던 각종 만화 세계사 시리즈. 이 오류의 원조는 일본 [[슈에이샤]]에서 발간된 16권짜리《세계의 역사》에 이렇게 묘사된 것을 너도나도 베껴서이다.] 때문에, 프리드리히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그저 음악과 문학만 사랑했던 유약해빠진 샌님이었다가 왕위에 오르자 갑작스레 전쟁광으로 돌변했다는 인식이 강하게 박혀 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도 않다. 프리드리히가 어렸을 적부터 문예를 사랑했으며 풍부한 교양과 감수성의 소유자였다는 것은 분명 사실이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는 청소년 시절부터 꾸준히 야전 훈련과 군사학 수업을 받았기에 군사적 식견 또한 풍부했고 전쟁과 무기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런 그가 왕위를 계승하고 곧 전쟁을 일으킨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방향은 반대이지만 비슷한 성격의 평가를 받는 인물이 바로 [[조선]]의 [[문종(조선)|문종]]인데 문종 역시 [[4군 6진]]을 개척하고 나라를 강인하게 만든 아버지 [[세종대왕]]의 뒤를 이은데다 [[단종(조선)|자신의 아들]]이 [[세조(조선)|숙부]]한테 허무하게 왕위를 잃다보니 덩달아 문약한 이미지가 생겨버렸는데 정작 문종 본인은 늘 문치주의를 강요해 망한 [[북송|송나라]]를 언급하며 부국강병을 이야기 했고 대신들조차 "상께서 무(武)만을 숭상하니 다들 무에만 관심있다."고 우려했을 정도였다. 또한 [[화차(무기)|화차]] 등을 개량할 정도의 화력덕후였다.] * 프리드리히는 부드러운 교양인이라는 세간의 이미지와 달리 외골수에 독선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만사에 타인을 불신하는 등 냉소적인 태도가 강했다. 계몽군주치고는 아래 폴란드 혐오 관련 단락에서도 나오듯 인종차별주의 정서를 극복하지 못한 모습도 보였다.[* 물론 당시는 문화상대주의의 발달이 현대에 비하면 미약했던 시기이긴 했지만, 이미 [[바야돌리드 논쟁]]이 끝난지 한참 지난 시점에서 [[아메리카 원주민]]까지 야만인 취급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굳이 뽑자면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서 적 원주민 진영을 저주하는 정도. 더군다나 아마 이로쿼이에 대해 무지해서 그랬겠지만, 그가 멸시한 [[이로쿼이 연맹]]은 동맹국이었던 영국의 편에서 싸웠다. 훗날 벌어진 원주민과 유럽인들과의 갈등도 진짜로 원주민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거나 열등인종 취급해서 벌어졌다기보다는 구대륙에서 벌어졌던 것처럼 단순히 영토를 둘러싼 갈등에 가까웠다.] 험난한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면 성격이 이렇게 삐뚤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빈정대는 것을 좋아했다는 기록을 보면 어느 정도 타고난 면도 있었다.] 특히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거나, 혹은 타인이 자신의 견해에 토를 다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그러다보니 신하들과의 갈등과 대립이 심했다. 후술하겠지만 세금을 거두기 위해 커피 밀매를 막으려는 목적으로 커피 냄새 탐지원까지 창설했을 때에는, 측근들조차 아연실색하여 만류했으나 프리드리히의 고집을 꺾지는 못하였다. 말년에는 나이도 많았을 뿐더러 7년 전쟁을 거치는 동안 단순한 일국의 군주를 초월해서 이미 온 유럽의 위대한 전쟁영웅이 되어있었기에, 아무도 프리드리히를 말릴 수 없었고 때문에 그 고질적인 쇠고집은 더욱 심해졌다.[* 다만 명군으로 평가받는 지도자들이 의외로 말년에 갈수록 자기 고집이 강한 행보를 보이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젊은 시절에는 부하들의 의견을 잘 수렴하다가도 점차 외골수가 된 프리드리히처럼, 한국 역사상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세종(조선)|세종]]도 말년에는 이전처럼 토론으로 신하들의 반대를 논박하는 게 아니라 다소 화를 내면서 왕의 지위로 깔아뭉개는 모습을 많이 보였다. 특히 [[훈민정음]]에 관해서 [[최만리]]와 [[정창손]]을 깔 때를 보면 이게 세종 맞나 싶을 정도. 다만 최만리의 경우 훈민정음 배포를 위해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인 것일 뿐 악감정은 없었다. 하지만 정창손의 경우 유학자로서 유교와 관련된 사상을 전면 부정하는 불경과 폭언을 내뱉은 강상죄를 저질러서, 세종이 그의 재능을 명분으로 선처해주지 않았으면 가문째로 멸문당해도 할말 없는 자업자득의 케이스인지라 대우가 다르다.] * 집안이 전부 군인인 [[호엔촐레른 가문]][*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제후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프리드리히 대왕 때문에 군인 집안 이미지가 강한데 실제로 가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전장에서 활약한 인물이 거의 없다. 그나마 전장에서 활약했어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브란덴부르크)|프리드리히 1세]], [[요아힘 2세 헥토어]]처럼 군사적인 재능이 젬병인 경우가 더 많았다.]답게 프리드리히의 남동생들 또한 지휘관으로서 전쟁에 참여했다. 특히 프로이센의 장군이었던 [[프리드리히 하인리히]]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6남.] 재능이 특출났다. 프리드리히 대왕 최악의 패배인 쿠네르스도르프 전투에서도 유일하게 전황을 똑바로 파악하고 있던 지휘관으로[* 대왕이 [[러시아 제국군]]의 측면을 공격하자 공격을 중지하라고 건의했으나 대왕은 공격을 강행했고 하인리히의 예상대로 예비대인 오스트리아 기병대가 배후를 공략했다. 프리드리히는 병력을 재정비하고 다시 공격을 가했으나 공격은 러시아군의 완강한 수비로 막힌 상태에서 아까의 예비대를 포함한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이 반격을 가했고, 결국 프로이센군의 좌익이 붕괴되면서 설명 생략. 프리드리히가 동생의 건의대로 공격을 중지했으면 이겼을 것이다.], 전투 결과 프로이센군이 완전히 와해되자[* 5만 명에 달하던 프리드리히의 병력이 전투 이후 3천 명 밖에 남지 않았다. 프리드리히 본인도 절망하여 "난 이제 끝났다."면서 베를린으로 편지를 보냈을 정도. 물론 3천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다 죽은 게 아니라 대부분이 도망치면서 흩어져서 그렇다.] 그것을 수습하기까지 했다. 이 전투 이후 프리드리히는 동생을 완전히 신뢰했다. 7년 전쟁 유럽 전선의 마지막 전투인 프라이베르크 전투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게 한 지휘관 또한 바로 프리드리히 하인리히였다. *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때까지만 해도 프로이센군 대부분이 자국민이었지만, 프리드리히 대왕의 시대에는 외국인 병사의 비율이 반을 넘었다. 이는 프리드리히 대왕이 자국민들을 믿지 않거나 외국인 병사들을 특별히 선호한 것이 아니라, 세금과 인구 문제로 인한 판단이었다. 프리드리히가 물려받은 프로이센의 인구가 200만명을 좀 넘을 정도였는데, 군대는 8만명이였다.[* 일반적으로 평시 군대 규모는 전 인구의 1% 내외가 적합하다. 즉 2만 명이 적정선이나 현실은 이에 4배였던 셈.] 프리드리히는 군대를 19만명으로 늘렸는데, 군대를 순수하게 자국민들로 채우면 안 그래도 부족한 민간인들의 수가 줄어들고, 세금을 낼 사람도 줄어드는 것이다. 그래서 프리드리히는 자국민들은 민간인으로 둠으로써 세원을 확보하고, 그 돈으로 외국인을 고용해 병사로 쓰는 쪽을 선호했다. 물론 200만 명에서 8만 명도 한계까지 징집한 수준인데 여기서 더 쥐어짠다고, 19만 고용할 돈이 나올리는 없고 영국의 자금지원이 큰 역할을 했다. 영국의 지원이 끊기자 프로이센군도 같이 쪼그라들었다.[* 프리드리히 2세가 인구를 늘리기 위해 '''[[강간]]으로 인한 [[임신]]의 [[낙태]]마저 금지했다는 썰'''이 있는데 사실무근이다.] * [[폴란드-리투아니아]]와 [[폴란드인]]을 굉장히 혐오했다. 폴란드의 [[귀족공화정]]을 '''"[[오스만 제국]]을 제외하고 유럽에서 가장 쓰레기 같은 정부"'''라고 혹평했고,[* 이건 애초에 [[튜튼 기사단]]이라는 군사 국가로 출발한 프로이센과 지방 [[호족]]들의 [[과두제]] 공화국으로 출발한 폴란드-리투아니아 간의 근본적인 차이로 인한 것이다. 폴란드-리투아니아도 공화정이 잘 돌아갈때는 프로이센을 속국으로 만들고 러시아도 털어먹으며 오스만 제국과도 전면전을 벌이는 나라였다. 어느 나라의 제도든 잘될 때가 있고 잘못될 때가 있으며, 후기에는 유럽 최초의 성문[[헌법]]을 제정할 정도로 귀족들의 개혁이 열성적이었는데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멸망을 그냥 귀족과 공화정 탓으로 몰아가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결국 빠른 결단과 상명하복을 중시하는 군사국가의 특성상 프리드리히 2세가 가까이에 있는 정반대 체제의 국가인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해서 이런 취급을 한 것인데, 정작 그 자신도 제 독단으로 [[7년 전쟁]]에서 [[제1차 세계 대전]]의 [[독일 제국]]과 [[제2차 세계 대전]]의 [[나치 독일]] 프리퀄 찍으며 나라를 망하게 할 뻔했다.]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존재가 유럽에 알려지면서 폴란드인들을 [[이로쿼이]]나 [[유인원]]에 빗대기도 했다. [[폴란드 분할]]로 [[서프로이센]]을 얻은 후에는 폴란드 농민과 귀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거나 내쫓고, 그 땅에 독일인들을 정착시켜 독일의 일부로 동화하는 정책을 꾸준히 수행했다. 프리드리히 이후의 국왕들 역시 구폴란드 지역의 독일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수행했으며 이는 어느 정도 성과를 얻어, 프로이센 왕국 해체 직전인 1918년에는 서프로이센의 독일인 비율은 40%, [[독일어]]를 제1언어로 구사하는 인구의 비율은 70%까지 증가한다. 다만 이게 폴란드인의 반발을 초래해서 [[포젠]] 지역은 폴란드 내에서도 민족주의가 유달리 강성한 지역이 되었고, 결국 1918년 [[대폴란드 봉기]]와 그에 따른 독일인의 피난으로 인해 폴란드 서부에서 독일인 세력이 반쯤 무력화된다. * 1786년 남긴 정치적 유언에서 '''"현실적으로 지킬 수 있는 [[브란덴부르크]], [[마그데부르크]], 할버슈타트, [[슐레지엔]]만 국가의 실질적 본체로 구성되면 충분하며 [[동프로이센]]은 [[전쟁|적대행위]]가 시작되자마자 버려야한다."'''고 언급했다.[* 《강철왕국 프로이센》p.340] [[프로이센 왕국]]이 [[프로이센 공국]]이 아닌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의 후계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 중 하나이며, [[동프로이센]]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호엔촐레른 가문]]이 동프로이센에 별 신경을 안 썼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실제로 [[빌헬름 1세]]는 [[포츠담]]으로 [[천도]]를 고려하기도 했고, [[북독일 연방]]의 깃발에 빨간색과 하얀색이 들어가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의 색이 들어갔다고 아주 만족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고향이자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의 기원인 [[작센안할트]]의 알트마르크(Altmark) 지역을 가리켜 '''프로이센의 요람(„Wiege Preußens“)'''이라고 말했고, [[빌헬름 2세]]는 국고를 쏟아부어 [[베를린]] 티어가르텐(Tiergarten)에 조상들의 동상을 만드는 뻘짓을 감행했는데 호엔촐레른 가문이 통치하기 이전 아스카니아 가문과 [[비텔스바흐 가문]] [[변경백]]들의 동상까지 만들었으면서도 정작 [[프로이센 공국]]의 [[알브레히트(프로이센)|알브레히트]] 공작과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 공작의 동상은 만들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프리드리히 대왕의 후손이 세운 [[독일 제국]]은 동프로이센을 버리지 못 한 것이 원인 중 하나가 되어 패망하는데 경위인 즉, [[제1차 세계 대전]]을 앞두고 독일은 프랑스, 러시아를 동시에 상대할 때를 대비한 [[슐리펜 계획]]을 만들었는데, 이 때 슐리펜 계획에 따르면 프랑스를 제압하는 것이 먼저이기에 러시아가 예상보다 강할 시 동프로이센 지역은 '''"일단 내준다."'''가 골자다. 그것을 포기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프랑스를 제압하는게 더 먼저니까 러시아가 생각보다 강하다면 굳이 먼저 러시아와 싸워 이길 생각하지 말라는건데 문제는 '''이걸 안 지켰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서부전선]]에 투입된 병사를 [[동부전선]]에 세웠다가 정작 [[타넨베르크 전투|동부전선에서는 이미 승리를 거뒀는데]] 서부전선이 위험해져서 동원된 병사를 다시 서부전선으로 내보내 결과적으로 이도저도 아닌 결과가 되어버렸고 단기 결전을 목표로 둔 본 계획과는 달리 장기적인 [[참호전]]이 되어버렸다.] * 개를 좋아해서 애완견을 많이 키웠는데, 특히 [[개]]를 두고 "사람의 가장 좋은 친구"라는 표현을 최초로 사용한 인물로도 알려졌고 그 중에서 [[그레이 하운드]]를 제일 좋아했다. 죽을 때도 유언으로 자신이 지은 [[상수시 궁전]] 뜰의 충견들 곁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길 정도였다. 하지만 뒤를 이은 조카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큰아버지이자 선왕인 프리드리히 2세를[* 프리드리히 대왕이 슬하에 자식 없이 승하하면서(앞서 서술했다시피 왕비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나와 평생 서먹했다.), 이후 왕위는 프리드리히의 형제였던 아우구스트 빌헬름 왕자의 아들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이었다.] 차마 서민처럼 땅 속에 묻는다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 생각해서, 프리드리히의 유언과는 달리 그의 시신을 포츠담 가르니존 교회에 석관묘 형태로 안장했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폭격으로 유해가 파괴될 것을 우려해 [[아돌프 히틀러]]가 [[튀링겐]] 주 베른테로데의 소금 광산으로 석관을 옮기라고 지시했고[* 참고로 프리드리히 대왕의 유해와 같이 탄넨베르크 기념묘지에 안장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영웅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아내의 유해, 샤를로텐부르크 궁에 안장된 [[독일 제국]]의 초대 황제인 [[빌헬름 1세]]의 유해 또한 소금 광산으로 피신했다.] 종전 직전인 1945년 4월 27일, 미군이 유해를 찾아내 유언대로 이장하려 했으나 상수시 궁전이 있는 포츠담이 소련 관할이 된 관계로 1946년 마르부르크 성에 임시로 이장되었다가 1953년 서독 정부가 본관인 바덴뷔르템베르크의 호엔촐레른 성으로 다시 이장했고 통일 후인 1991년, 사망한 지 205년만에서야 유언대로 상수시 궁전 정원에 안장되었다. * 당시 거의 모든 유럽의 왕실이 그랬지만 프리드리히의 일상어는 [[독일어]]가 아니라 [[프랑스어]]였다. 프리드리히 대왕도 정무 언어로 프랑스어를 썼고, 프리드리히가 남긴 모든 글도 프랑스어로 되어 있다. 한 신하와 [[VS놀이|독일어 vs 프랑스어]]라는 주제로 토론을 한 적도 있을 정도다. * 물론 평생지기 [[볼테르]]와의 대화와 서간 왕래도 전부 [[프랑스어]]로 주고받았다. 그런데 이 편지라는 것들 중에 뭔가 비범한 것들도 섞여 있는데, 볼테르가 [[포츠담]]에 기거하던 시절 프리드리히 대왕이 사람을 시켜 보낸 편지에는 '''[[https://fr.wikipedia.org/wiki/R%C3%A9bus#/media/Fichier:Frederick-rebus.png|웬 그림 문자가 섞인 분수]][* [[https://fr.m.wikipedia.org/wiki/R%C3%A9bus#|위키백과 설명 링크]]]''' 하나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볼테르의 답장은 더 간단해서 "Ga!"라고만 덜렁 적혀 있었다. 이것이 무엇인고 하니, 프리드리히 대왕과 볼테르는 프랑스어를 이용한 말장난을 주고 받은 것. 프리드리히 대왕이 보낸 메모의 분수 숫자를 프랑스어로 읽어 보면 "Deux mains sous pe à cent sous scie"[* 직역하면 "100 분의 [[톱]]에 [[손|양손]] 분의 p."]가 되는데, 이것은 발음이 같은 프랑스어 문장인 "Demain souper à Sanssouci", 직역하면 '''"내일 상수시 궁전에서 저녁식사"'''라는 말로 읽을 수 있다. 즉, 프리드리히 2세가 볼테르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은 '''"내일 상수시 궁전에서 저녁 만찬이라도 함께 들겠소?(Demain souper à Sanssouci?)"''' 볼테르가 보낸 "Ga!"[* 또는 Ja!라고 보냈다고도 한다. 프랑스어로는 G와 J가 똑같이 ‘제‘ 발음이라 후술할 넌센스의 답으로도 제격인데다가 동시에 독일어로 Ja는 긍정의 대답(Yes)의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에 [[펀치라인|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라는 답장의 경우, 그 단어 자체에는 아무런 뜻이 없다. 하지만 이것을 프랑스어로 풀어보면 넌센스 퀴즈가 된다. Ga를 "Gé grand, A petit"(대문자 G, 소문자 a)라고 풀어서 읽으면, "J’ai grand appétit"와 발음이 비슷해진다. 둘 다 "제 그랑드[* 뒤에 나오는 단어가 모음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grand의 d를 묵음 처리하지 않는다.] 아뻬띠"로 읽으며, 이 문장의 뜻을 직역하면 '''"나는 매우 크게 식욕을 느낍니다."''' 즉, 볼테르가 프리드리히 2세에게 보낸 답장의 내용은 '''"시장하옵니다 폐하! (J’ai grand appétit!)"'''였던 것. 그리고 실제로 볼테르는 다음 날 [[상수시 궁전]]에 등장함으로써 프리드리히 대왕을 만족시켰다고 한다. * 전해지는 일화로, 궁의 정원에서 재배 중이었던 벚나무의 [[체리]]를 [[참새]]들이 먹어치우자, 화가 나서 자기 벚나무에 참새가 1마리도 오지 못하게 막았다. 그러나 참새가 오지 않아 오히려 벚나무에 벌레가 꼬이고 병들어 버렸는데, 그 모습을 보고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쳐 참새를 내쫓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이 너무 명확하기에 창작된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파일:프리드리쿠스 렉스.jpg]] * 위에서 잠깐 지나가듯 언급되었지만 '''음악에 대해 관심과 조예가 대단히 깊었다'''. 1749년에는 그 유명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궁으로 초청했고, 프리드리히 본인이 [[바로크]] 시대의 [[플루트]]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요한 요아힘 크반츠에게 플루트를 배웠으며, 무엇보다도 프리드리히 곁에는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가 측근으로 있었다.[* 대중들에게 유명한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차남. 실내악 단원으로 있다가 훗날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의 뒤를 이어 함부르크로 가 악장 생활을 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한 예산 감축에 따라 자신의 급료가 궁정 광대보다 낮아지자 미련없이 떠났다.] 아무튼 본인의 열정도 열정이지만, 주위에 이처럼 훌륭한 음악가들이 많았던 덕에 프리드리히는 인류 역사상 그리 흔치 않은 '''"군주 겸 작곡가"'''가 되었다. 프리드리히의 음악을 직접 들어보자. [[https://youtu.be/58BS7NNHAf4|듣기]] [[쾨니히그레츠 행진곡]]에 영향을 주었던 "[[호엔프리드베르크 행진곡]]" 역시 프리드리히가 작곡했다는 주장도 있다. 다만 300여 곡이나 되는 자작곡이 있고 연주도 자주 한 탓에 천재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플루트 연주자로서의 능력은 잘 해봐야 2류 정도였다는 게 당시의 평가이자 함정. 더군다나 바로크 음악의 시대가 끝나가던 시절에 대략 반 세기 전에나 유행하던 스타일을 고집했던지라, 프리드리히의 음악 취향은 좋게 말하면 고풍스러웠고 돌려 말하면 "옛 음악에만 꽂힌" 고전 덕후나 마찬가지였다. * [[강선]]의 개념을 고안한 인물인 벤자민 로빈스의 저서 <새로운 포의 원리>가 발간되자, 직접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에게 번역을 맡겨 탐독했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올 정도로 진성 중의 진성이자 성공한 밀덕 그 자체였다. * [[커피]]를 좋아했다는 말도 전해지는데, 프리드리히가 마시던 커피는 [[샴페인]]으로 끓여서 [[겨자]]로 맛을 낸 것이었다고 한다. 너무 많이 마셔서 담당 의사에게 마시는 양을 줄이란 말을 들었지만, '''줄여서 오전에 7~8잔, 오후에 한 주전자였다.'''[*출처 《먹거리의 역사 (하)》, 저자: 마귈론 투생-사마] * 이 시기에 커피와 관련된 웃픈 직업이 있었는데 '''커피 냄새 탐지원'''이었다. 커피가 프로이센으로 들어온 후 널리 보급되었는데, 문제는 커피에 붙은 세금이 장난 아니게 높았던지라[* 고가의 수입품이었던 만큼 사치품 수입은 무역흑자를 유지하려는 중상주의적 이상에 어긋난다는 여론과 악마의 음료라는 종교계의 반발 그리고 주로 서민층에서 커피의 대용 작물로 쓰이던 치커리의 경작지에 다른 작물을 심는다면 더 효율적이라는 시각, 당대 국민음료였던 맥주와 와인의 소비, 판매가 저하된다는 여론 등 복합적이었다.]밀수가 성행했는데 프리드리히 대왕은 전쟁으로 파탄난 재정을 메꿀 겸 밀수를 단호히 금지하는 한편 '''허락 받지 않고 커피 볶는 것마저 금지시켰다.''' 그리고 불법적으로 볶은 커피가 있는지 알아오라며 커피 냄새 탐지원이라는 희한한 직업을 만들었는데 이들은 남의 부엌을 멋대로 뒤질 수 있었을뿐더러 불법적으로 볶은 커피를 찾아내면 추가 수당을 얻어냈기에 매우 적극적으로 일했다. 당연히 서민들의 원성을 살 수 밖에 없었으며, 결국 프리드리히 대왕의 죽음과 동시에 이 희한한 직업 또한 사라졌다.[* 사실 커피 냄새 탐지원의 창설 목적은 단순히 세금을 더 거두는데 그치지 않고 전쟁이 끝난 후 실업자 신세가 된 퇴역병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려는 의도도 있었다.] * 중국의 문화를 [[시누아즈리|동경]]해서 말년의 거처로 지은 상수시 궁전의 정원에는 중국식으로 설계한 다방(茶房)이 있는데, 건물 주변에 중국식 복장을 입은 동상을 세워 놓고 천장에도 중국 화풍을 흉내낸 그림을 그려놓았다고. 다만 중국에 대해 자세히 알고 좋아한 것은 아니고, 당시 유럽에서 중국의 도자기[* 특히 인물 초상화가 그려진 [[청화백자]]. 네덜란드 같은 나라에서 일부러 주문제작했고, 도자기 열풍이 불다 보니 도자기에 그려진 초상화에까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가 유행한 것에 영향을 받은 것. 이것은 비단 프리드리히만의 경향이 아니어서, 이 무렵에 지어진 왕궁을 보면 중국산 도자기를 한가득 진열해 둔 방이 적어도 하나씩은 있다. * [[감자]] 이야기도 그렇고 또 군인으로서의 이미지가 강한 탓에, 평소 식사도 대충 감자로 때웠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상당한 [[미식가]]이자 대식가였다. 매일 거창한 만찬을 즐기는 것은 물론이었고, 말년에 병으로 골골거릴 때도 푸짐한 고기 요리와 술, 과자를 즐겼다. * 앞서 서술했듯이 아버지의 지독한 [[폭력]]에 시달리며 자랐으며, 이런 경험은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평생 동안 그늘을 드리웠다. 나이가 50줄의 노년이 되어서도 왕태자 시절로 돌아가서 아버지에게 강제로 체포되는 악몽을 꾸거나, 꿈속에서 결국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안도하는 꿈을 꾸었다는 등의 기록이 프리드리히 2세의 개인비서들을 통해 남아있다. 그런지 개인적인 인간관계는 폐쇄적이고 인간 불신도 있었으며, 심지어 개의 충성심을 극찬하며 사람은 개만도 못하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매우 고독하게 살았던 사람으로 말년에 가족이나 가까운 친지들이 세상을 뜨자, 기르던 [[그레이하운드]]들만을 심적으로 가까이 했다고 하며 자신이 죽으면 애견들 곁에 묻어달라는 부탁도 남겼다. * 한 대위가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폐하와 같은 훌륭한 전략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요?"하고 묻자, 프리드리히 대왕은 전쟁사를 열심히 연구하라는 충고를 남겼다. 하지만 그 대위가 "그런 이론보다 수많은 실전경험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재차 질문하자 대왕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부대에는 60회 이상 전쟁을 치른 [[노새]]가 있지만, 그들은 아직도 노새다."''' 즉, 외형만 추구할 것이 아니라 전쟁사를 통해서 전략의 핵심과 묘리를 찾으라는 것이다. 강병을 육성하는데는 어설픈 실천보다 체계적이고 철저한 이론 공부의 중요성을 설파하는데 종종 인용되는 사례이다. > "A mule, though he should have made ten campaigns under prince Eugene, would not have improved in his tactics." > "어떤 노새가 [[사부아 공자 외젠|오이겐 공]] 밑에서 열 번의 전투에 참가했다 한들, 전술 능력을 함양하지는 못했을 걸세." 다만 이 경구가 등장한 최초의 판본에 따르자면 대왕이 프랑스군의 [[샤를 루이 오귀스트 푸케]] 원수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다른 판본들에서는 [[모리스 드 삭스]] 원수의 어록이라고도 한다. 어느 판본이든지 간에 이론에 대한 학습과 논리적 사유 없이 경험만 아무리 쌓은들, 발전은 없을 것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 [[프리드리히 빌헬름|증조부]] 대 때부터 시작해 프리드리히 대왕 대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 프로이센의 군국주의 정책은 분명 단기적으로는 유럽의 변방 소국에 불과하던 프로이센을 열강의 반열에 올려준 원동력 가운데 하나였으나, 장기적으로는 근현대 독일의 군국주의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프로이센과 프리드리히의 유산이 나치즘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편견이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프로이센]] 항목 참조.] 당시 유럽 어느 나라가 안그랬겠냐마는 프리드리히 대왕 때 절정에 이른 군국주의 정책의 결과 프로이센군의 규모는 급격하게 커졌고[* 특히 선대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때에는 전 프로이센 인구의 4분의 1이 군인일 정도였다.], 이는 필연적으로 부작용을 가져와 구타, 가혹행위, 병영부조리가 군 내부에 만연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프로이센군의 악습은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샤른호스트]]의 군제개혁을 거치면서 대부분 사라졌다. 오히려 샤른호스트 이후의 프로이센군과 그의 후신인 독일 제국군은 병영부조리나 가혹한 형벌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매우 적었다.[* 선진적이라는 인식이 있는 영국군마저 채찍형이 1881년까지 있었고 러시아 제국군의 사병 대우는 1917년에 멸망 할때까지도 매우 개판이었다.] 일본이 개항한게 아무리 빨리 잡아도 1854년인데 이미 50년 전에 없어진 프로이센군의 악습을 벤치마킹 했다고 볼수는 없다. 그리고 프로이센군의 가혹행위가 유명하지만 전열보병 시기의 전장에서는 적의 총알이 날라오면 그대로 맞으면서 진형을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유럽의 모든 군대에서는 비인간적인 형벌이 난무했다. * 히틀러의 마지막 순간을 다룬 영화《[[몰락]]》[* 히틀러가 부하들에게 연필 집어던지고 바락바락 소리지르는 장면이 유명한 그 영화다. 패러디도 많이 되어서 유명한 장면.]에서는 [[히틀러]]가 프리드리히 대왕의 초상화를 보며 고뇌에 빠지는 장면이 있다. [[FDR|루즈벨트]] 대통령이 죽고, 대통령직을 승계한 [[트루먼]]이 [[표트르 3세]]의 활약을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재현해주기를 기대했던 것]]을 표현한 장면. 실제로 괴벨스도 히틀러에게 루즈벨트의 부고를 전할때 '여제가 죽었다'며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의 죽음과 동일시하기도 했다고 하며, 히틀러의 후임으로 독일 대통령이 된 [[카를 되니츠]]도 반공주의를 내걸고 [[소련]]에 맞서 연합국들과 강화하려 했으나 서방의 떨떠름한 반응과 소련의 반발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런 망상을 한게 히틀러 하나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트루먼은 [[대한민국|동방의 한 나라]]에서 전쟁이 벌어지자 단 3일만에 파병 결정을 할 정도로 과감한 인물이었다.] 사실 트루먼도 갑자기 전쟁을 그만둘 사람은 아니었지만, 당시 미국인들의 대부분이 전쟁수행 의지가 왕성했기 때문에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나치의 만행들이 밝혀진 상황에서 서방 진영은 당연히 공산주의 진영인 소련보다, 나치 독일을 더욱 위험하게 여겼고 히틀러의 생각은 망상으로 끝났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초상은 실제로 [[퓌러붕커]]에 걸려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 전쟁 자금을 대기 위해 [[은]] 함량을 낮춘 악성 은화를 주조했는데, 그 하청을 맡긴 게 [[유대인]]이었다. 당연히 독일인들은 (자기 왕에게 그럴 순 없으니) 횡령한 돈으로 흥청거리는 유대인을 향한 혐오가 짙어졌다. * 전해지는 바로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외국인 [[용병]]들은 [[독일어]]를 잘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프리드리히는 이들을 만날 때마다 질문을 했다. 다행스럽게도 프리드리히가 하는 질문은 "나이가 몇인가?", "우리 군대에서 몇 년간 근무했나?", "근무 조건과 급식 중 무엇이 더 만족스러운가?"로 거의 정해져 있어서 [[족보#s-2.3|그냥 대답을 정해 두고 프리드리히가 물어보면 대답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프리드리히가 어느 용병[* 당시 이 용병은 굉장히 젋은 용병이었다고 한다.]을 만났는데, 하필 그 날은 프리드리히 2세가 '''질문 순서를 바꿔서 내서''' [[동문서답|굉장히 대답이 이상하게 나왔다고 한다.]] 그 질답을 서술해보면 "우리 군대에서 몇 년간 근무했는가?", '''"25년(25세) 입니다."''', "나이가 어떻게 되는가?", '''"2살(2년)입니다."''' 이런 괴상한 대답이 나오자 어이가 없어진 프리드리히 2세는 '''"대체 그대와 나중 누가 바보인가?"'''라는 질문을 했는데 그것을 알아들을 리 없는 용병의 대답은 '''"둘 다입니다."'''[* 원래는 나이 25세, 군대 복무 2년째, 근무 조건과 급식 둘 다 만족이라는 뜻이었다.][* 판본에 따라 시간대가 [[보불전쟁]] 이후로, 프리드리히가 [[빌헬름 1세]]로, 용병이 [[알자스-로렌]] 출신의 [[프랑스]]계 병사로 바뀐 경우도 있다.] * 명성에 걸맞게 근세 유럽을 다루는 [[Europa Universalis IV]]에는 행정, 외교, 군사 모든 능력치가 6점 만점인 소위 6/6/6 군주로 나온다.[* [[악바르]] 대제, [[구스타프 2세 아돌프]] 등이 6/6/6이고 [[세종대왕]]조차 6/5/5이다.]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문명 1]], [[문명 4]] 등의 게임에서 독일의 지도자로 등장하며, [[창세기전 외전 서풍의 광시곡]] 등장인물 [[알프레드 프레데릭]]의 모델이다. * 역사적 비중과 독일에서의 인지도와 달리 영상매체에서의 등장은 상당히 저조한 편이다. 이는 프리드리히 2세의 능력치가 다방면에서 거의 만렙을 찍었기 때문인데, [[삼국지]]로 치면 [[조조]]와 [[주유(삼국지)|주유]]의 장점만 갖다 놓은 인물이다. 정치적 철학과 사상에서 이미 당대의 군주들보다 앞선 것은 기본이고 당대의 석학들과 토론 배틀을 할 정도의 학식과 비록 아마추어이긴 해도 오늘날로 치면 [[덕후]]에 준하는 [[바로크 음악]] 연주 실력을 갖춘 당대의 [[팔방미인]]인데, 이런 사람을 제대로 연기하려면 정치학과 음악 무예에 능한 삼국지의 주유의 거의 상위호환급 인물이 되어야 한다. 이런 탓에 독일을 비롯한 중유럽 최고의 먼치킨과 인지도를 가졌음에도 영상화할 엄두가 안 난다고 한다. 대략 중국과 한국에서 [[광무제]]와 [[세종대왕]]의 치세를 다룬 사극이 많이 없는 것과 비슷하다. 또한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히틀러]]가 자타가 인정한 역대급 [[프리드리히 대왕|프리드리히]] 추종자였고 과거 [[군국주의]]와 [[파시즘]] 국가들의 롤모델인 탓에 프리드리히 영상화를 터부시 하는 부분도 없지는 않다.[* 심지어 일부 유럽 내 [[네오 나치]]들조차도 프리드리히 대왕을 다루는 사극이 잘 안 만들어지는 이유에 대해 [[나치]]가 큰 책임을 지고 있다고 저자세를 보일 정도이다.] 하지만 현재의 독일이 프리드리히 대왕의 영상화에 미적지근한 결정적인 이유는 그냥 독일인들이 [[프로이센]] 역사에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들의 [[나치 독일|최대 흑역사 12년]]에만 관심을 가지고 활발하게 사극으로 제작되지만, 그 이전의 시대는 큰 관심이 없다. 그나마 있다면 [[독일 통일|비스마르크 시대]] 정도? 이는 전후 독일 정부가 나치를 축출하며 그 이전의 '제2제국'인 [[독일 제국]]도 꺼리는데다, [[프로이센]]의 군국주의가 나치를 배양하는 온상이 되었다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서 프로이센은 특히 북부와 동부 독일이 근거지라서 서부 독일이 그렇게 안 좋아하는데다 남독일(특히 [[바이에른]])로 가면 [[지역감정]]마저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대왕의 일대기는 의외로 큰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프리드리히 사극도 제작되지 않는 것. 오히려 역설적으로 과거 프로이센 연고가 있어 대왕을 잘 아는 독일 [[브란덴부르크 주|일부 지방]] 출신들이나 독일 역덕들은 전반적으로 프리드리히 대왕을 매우 좋게 평가한다. 다시말해 프리드리히 대왕의 경우는 이 역사적 인물의 호불호가 아니라 단순히 역사적 배경 때문에 생겨난 무관심이 문제이다. * 후대에 [[7년 전쟁]]을 배경으로 한《[[프리드리히 대왕 척탄병 행진곡]]》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 [[대체역사 마이너 갤러리]]에서 연재 중인《합스부르크의 데릴사위로 살아남기》에서는 주인공이 빙의한 대상이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여기서는 라이벌이었던 [[마리아 테레지아]]와 맺어졌으며 프로이센의 왕이 아니라 [[합스부르크]]의 황제가 되었다. * 위와 마찬가지로 [[대체역사 마이너 갤러리]]에서 연재하다가 문피아로 넘어가 유료화된 소설《[[감자세자와 뒤주대왕]]》에서는 조선의 [[사도세자]]와 상호간에 빙의해버렸다. 조선을 프로이센 맛으로 갈아엎고는 [[건륭제]]와 요서대첩을 벌이며 [[만주회복|만반도]]를 이룩해 칭송받는 중. * [[야사(역사)|야사]]로 일명 '''방앗간 재판'''이 있다. 상수시 궁전을 세울 당시 인근에 풍차 방앗간이 있었는데, 이게 거슬린 프리드리히는 방앗간 주인에게 철거하라고 강요했다. 그러자 방앗간 주인은 "조상 때부터 자자손손 물려받은 방앗간을 함부로 없앨 순 없다. 차라리 재판소에 고소를 하겠다."라고 반박했다. 이에 프리드리히는 철거를 철회하고 그대로 뒀다는 이야기. 하지만 이 이야기는 1787년에 장 찰스 라보(Jean-Charles Laveaux)가 [[프랑스어]]로 출간한 책《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2세의 삶(Vie de Frederic II, Roi de Prusse)》에서 창작한 이야기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